돌이킬 수 없는 (Irreversible, 2002)
시간은 모든 것을 망가뜨린다...
정말로 시간이 모든 것을 망가뜨리는 걸까? 원래 그렇게 되도록 정해진 것은 아닐까? 단지 그러한 결과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힘 없는 존재들의 변명 밖에 지나지 않는게 아닐까? 그만큼 시간 앞에서는 힘 없다는, 혹은 누구에게나 시간은 냉정하다는 것 아닐까?
사실, 솔직히 이러한 결과를 굳이 마르쿠스나 피에르에게 물을 필요는 없다고 본다. 마르쿠스가 조금만 더 알렉스에게 신경을 썼더라면, 아니면 피에르가 그렇게 가버리는 알렉스를 잡거나 바래다 줬더라면... 이러한 생각을 한다면, 그 잘잘못의 끝은 절대 찾을 수 없다고 본다. 이미 그렇게 되어버렸기에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그 누구에게도 없는게 아닐까?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이미 그렇게 되어버린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것이다.
이 둘은 단지 그들 나름대로 그것을 받아들인 것 뿐이다.
두 말할 필요없이, 초반부에 피에르가 머리통이 깨져 으스러지도록 복수를 하는 장면과 더불어 가장 충격적인 장면이 아닐까? 9분여의 긴 시간동안 끊김없이 한 여자가 처참하게 강간당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저 장면은 단지 그 끔찍한 모습 뿐만 아니라 그 이면에 담긴 사회의 가장 진부한 시스템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해 준다. 여자와 남자로 대변되는 치자와 피치자, 혹은 힘 있는 자와 힘 없는 자가 한 공간에 공존하고 있는 저 기괴한 장면은 그러한 관계들 간의 대립 자체가 무의미 함을 보여주는 듯하여 씁쓸한 맛을 준다. 그와 더불어 남자가 여자를 거칠게 강간하는 도중에 그걸 목격하고도 아무 말 없이 돌아서는 한 인간의 모습과 저 지하도는 바로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이 곳을 적나라게 보여주는게 아닐까?
옛 연인, 여자 그리고 현재의 연인 이렇게 셋이 대화를 나누는 이 장면은 상당히 불쾌감을 주었다. 옛 연인은 시종일관 여자에게 현재의 연인과의 성생활, 그리고 자신과의 성생활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비교하고 생각한다. 이러한 관계의 사람들이 그런 주제의 대화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단지 서로가 서로를 공유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들게하여 상당히 불쾌하였다. 뭐...단지 내가 그렇게 느꼈다는 것 뿐이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카메라의 시선은 보는 내내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로 어지러웠다. 그리고 그 어지러운 머리로 도대체 이 영화를 보고 무얼 느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시간이 모든 것을 망가뜨린다고 해서 시간을 잡을 수도 없는 것이고, 또 모든 일련의 사건이 누구의 잘못인지를 따지는 것 보다는 단지 그렇게 되어진 것이기에 그 되어진 것을 받아들이는 태도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라면, 세상에 그 어떤 남자가 마르쿠스와 피에르의 저런 행동에 욕을 하겠는가? 나? 내가 저런 경우라도 마르쿠스나 피에르처럼 그러겠는가? 절대. 왜냐면 난 절대 혼자 보내지 않으니까. 그 자극적이고 현실적인 장면에 호기심이 있어서 보고 싶었던 영화였는데 그다지 편한 마음으로 감상할 만한 것은 아닌거 같다. 굳이 나라면 어떠했을까하는 감정이입도 별 의미가 없는 듯한, 단지 끔찍한 내용의 영화를 봤다는 생각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