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식 정원 살인 사건 (The Draughtsman's Contract, 1982)
피터 그리너웨이 (peter Greenaway)감독의 1982년도 작품으로 영국의 왕정복고 시대 직후 한 귀족의 저택에서 발생하는 살인과 그에 관계된 사람들 간의 미스테리한 사건, 그리고 그 이면에 깔린 당대 귀족사회의 부정과 알력다툼 등이 중심인 영화이다.
이 영화에선 왠지 모르게 과장되고 거북한 이들의 옷차림처럼 오만하고 가식적인 당시 영국 귀족의 일상 생활에 대한 단면을 볼 수 있다. 앙드레타입의 화려한 의상, 거북할 정도로 높고 부푼 남성들의 가발, 그리고 오만함이 베어나오는 영국식 발음. 순종적인 듯 하면서도 온갖 부정을 일삼는 여인들, 허풍선같은 체면으로 가득찬 남성들의 모습. 그리고 은근한 성적 대화 등.
영화는 귀족부인인 허버트 부인이 남편을 위해 남편의 넓은 영지를 그림으로 그려줄 네빌이라는 젊은 화가를 고용하면서 시작된다. 허버트 부인은 네빌에게 남편의 영지를 12장의 그림으로 그려달라고 주문하고 네빌은 독단적이면서도 오만한 행동으로 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한다. 부인과의 계약에 의해 상당한 보수와 더불어 자신이 원할 때마다 부인과 성관계를 가지면서도 그림을 그려나가는 네빌은 날마다 자신이 그리는 풍경에 없던 물건들이 여기저기 있게 되는 것을 발견하면서도 그때 그때 그것들을 포함시키며 그림을 그려간다. 그러던 어느날, 허버트 백작의 시신이 영지 내 도랑에서 발견된다. 허버트의 딸인 탈만 부인은 네빌에게 접근하여 네빌 역시 살인자 중에 한명으로 의심받고 있다며 그를 보호해준다는 핑계로 그와 성관계를 요구하고 네빌은 이를 받아들인다. 그림을 모두 완성한 네빌은 떠나지만, 곧 돌아와서는 원래 그릴려고 한 13번째 장소를 그리기 위해 돌아온다. 늘 그와의 성관계에서 굴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던 허버트 부인이 갑자기 네빌에게 호의적인 모습을 보이며 다시 성관계를 가지게 된다. 허버트 부인과 관계를 가진 후, 그녀의 딸인 탈만 부인이 그들에게 오고 모녀는 네빌에게 영지를 상속할 아이를 가지기 위해 그와 성관계를 가졌다고 말한다. 그날밤, 13번째 그림을 그리던 네빌은 허버트 백작의 사위등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지역 귀족들에게 죽음을 당하게 된다.
사회적 체면에 급급한 남자와, 억눌린 욕망을 부정한 방법으로 해결하는 여인들의 모습, 그리고 당시의 화려한 의상 등 영화는 언뜻 우리 영화 '스캔들'과도 흡사하다. 이 영화가 가지는 미덕 중 하나가 바로 그 시대의 재현이 아닐까 한다. 영화의 기본 구조는 당연 미스테리이다. 그러나 범인은 끝내 발견되지 않으며 살해동기 역시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여러 관점에서 추측할 만한 단서들은 많다. 즉, 보는 입장에서 각자의 주관에 의해 다양하게 해석할 요지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이야 이런 류의 영화가 넘쳐나지만 당시엔 획기적이지 않았을까 한다.
예나 지금이나 여자는 참 무서운거 같다. 이는 다분히 페미니적인 관점에서는 반발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스스로가 계약 조항에 원할 때마다 언제든지 성관계를 가지겠다는 것을 포함시켰으면서도 허버트 부인은 성폭행을 당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영화 전반부에선 거부감을 나타낸다. 그 때만 해도 난 정말 단지 허버트 백작에게 멋진 그림을 주기 위한 행동일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후반부에 자신의 딸과 함께 영지를 상속받을 아이를 낳기 위해 성관계를 가졌다는 말에 적지않게 충격을 받았다. 목적을 위해선 수단이 얼마나 추해질 수 있는건지 참 씁쓸한 대목이였다.
4시간 정도 되는 영화를 1시간 40여분 정도로 편집해서 그런지 영화가 매끄럽다기 보다는 흐름이 종종 끊긴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날마다 조금씩 생기는 여러 물건들과, 여기저기에 보이는 정체 불명의 사나이와 살인과의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아 왠지 미스테리물이라고 부르기엔 꺼림직한 면이 있다고 본다. '영국식 정원 살인 사건'이라는 우리나라 제목이 가지는, 왠지 모르게 무언가 있을 것만 같은 독특한 분위기에 영화를 보긴 했지만 그다지 생각했던 류의 영화는 아닌거 같다. 하지만 그런 면을 배제하고 본다면 꽤 괜찮은 영화인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