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보기/'01~'10

더 레슬러 (The Wrestler, 2008)

애들 놀이방 같은 곳에 한 덩치 큰 아저씨가 가뿐 숨을 내 쉬며 의자에 앉아있다. '20년 후'라는 자막과 함께.
곧 한 젊은이가 들어와 그에게 약간의 돈을 주며 관중이 적었다고 말한다. 아무 대꾸하지 않는 덩치 큰 아저씨는 짐을 다 챙기고는 나가다가 그의 팬이라는 두 청년에게 사인을 해 준다. 이렇게 영화는 시작된다.

한때는 잘나가던 프로 레슬러였던 그 덩치 큰 아저씨는 이젠 이 동네 저 동네를 돌아다니며 가끔 레슬링을 하고, 대형 마트에서 일을 하지만 늘 생활비가 모자른 나머지 가끔 자신의 트레일러에도 관리인이 문을 막아놔 들어가질 못한다. 가족이라곤 딸이 하나 있는데 남보다 더 못한 관계이고 그나마 단골 스트립바의 스트리퍼와 친하긴 하지만 그녀 역시 단지 좀 친한 손님 이상으로는 그를 대하지 않는다. 설상 가상으로 심장에 문제가 생겨 큰 마음 먹고 레슬링을 그만 두고 좀 더 사회적(?)으로 지내고 싶어하지만 어딜가도 쉽게 환영 받지 못하고 결국 다시 링으로 돌아간다.

가끔 TV에서 프로 레슬링을 보면 과장된 표정과 몸짓으로 서로 죽이려고 달려 드는 사람들이 나온다. 하지만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그건 단지 잘 짜여진 쇼일 뿐이고, 그래서 우린 다른 스포츠에서 볼 수 있는 그 진정성을 그들에게서 볼 수 있을까 의문을 가진다. 영화에서는 유독 이 덩치 큰 아저씨의 뒷모습을 자주 잡아 준다. 대기실에서 링으로 가는 순간에도 뒤에서만 그의 모습을 따라간다. 그래서 과연 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긴장을 하고 있는지 어디가 아픈 표정인지 아니면 마누라가 바람피고 있을까 걱정하거나 시합 끝나고 어디갈까 고민하거나, 뭐 이런 표정들은 볼 수 없고 단지 링 위에서 관중들의 환호에 화답하는 모습만 정면으로 보여준다. 좀 앞서 가는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우린 그들이 가진 고민이나 인간적인 모습을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이 덩치 큰 아저씨의 생활이 너무 사실적이다 못해 고문이라고 느낄 정도로 좀 끔찍하다. 특히나 시합 중에 스템플러를 몸에 박고 철조망을 몸에 두루는 이건 뭐 가학의 수준을 뛰어 넘은 듯한 시합을 보고 있자니, 또 그 모든걸 묵묵히 연기를 하는 미키 루크를 보니 농담으로 보기 안쓰러워서라도 상을 하나 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단지 그 뿐만이 아니다. 비록 링에서는 여러 선수들에게 존경을 받지만 그건 그 좁은 링에 서 있을 때 뿐이고 사회에서는 여기 저기서  다 그를 무시하고 그걸 다 참아내는 모습은 뭉클하다. 결국 마트에서 참지 못하고 화를 터트릴 때는 내가 다 시원하더구만.

사람들은 그냥 자기 일만 열심히 하면 행복해진다고 한다. 그런데 그게 다 맞는건 아닌거 같다. 적어도 이 덩치 큰 아저씨에겐 말이다. 이 덩치 큰 아저씨는 레슬링에 대한 열정으로 살아가지만 절대로 행복해 보이진 않는다. 그렇다고 딱히 다른걸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사면초가의 모습이 남 같지 않아서 영화를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더 와닿을지도 모른다.

인상적인 장면이 둘 있다. 하나는 레슬링을 은퇴하기로 마음 먹고 파트 타임으로 일하던 마트에서 주말 판매직을 하러 매장으로 가는 통로에서 흡사 선수가 대기실에서 링으로 가는 것처럼 관중의 환호소리를 같이 들려 주던 장면. 물론 링은 아니지만 경기에 나가는 것처럼 어떤 면에서는 떨렸을테지. 환호하는 관중 대신 물건을 살려고 길게 서 있는 사람들 뿐이라는게 다르지만.
그리고 또 하나는 마지막 경기에 나가기 전에 그를 말리러 온 캐시티에게 자신은 결국 링으로 갈거라며 하고, 자신이 여기 있다고 말하는 캐시티에게 무언가를 말하려는 순간 계집애 같은 커트 코베인이 다 망친 90년대를 중오하고 최고라고 말하던 건즈 앤 로지즈Guns N' Roses의 'Sweet Child O' Mine'이 그를 기다리는 관중들의 환호와 함께 흐르는데 왠지 모르는 전율이 확 올라왔다. 덩치 큰 아저씨, 거기서 말만 잘 하면 자신의 마음을 받아 줄거 같은 캐시티에게 간지 흐르는 대사를 친다.

"Hey, ...do you hear that? This is my call. I'm going in."

그리고는 긴 금발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링으로 들어가는데 정말 멋지다.

워낙 유명한 영화라서 그다지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할 필요 없을거 같다. 감독인 대런 애로노프스키Darren Aronofsky는 레퀴엠 (Requiem for a Dream, 2000)의 감독이었구나. 레퀴엠도 괜찮게 봤었는데.
캐시티 역의 마리사 토메이Marisa Tomei는 여기서 역할도 괜찮았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왓 위민 원트 (What Women Want, 2000)에서 환희에 젖은 얼굴로 닉은 섹스 신이야!라고 말하던게 생각나는구나, 아하하.
무엇보다도 예전 스타들이 다시 멋진 모습으로 돌아오는건 참 좋은거 같다. 미키 루크도 계속 좋은 영화에서 많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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